미디어

[조경논단] 정원이라는 성배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2025-08-08 10:40
링크로 이동 [출처 : 환경과조경]

제목을 입력하세요 (1).jpg

정원의 시대이다. 서울정원박람회를 통해 보라매 공원을 새롭게 단장하자마자 100만이 넘는 인원이 다녀갔고, 서울시는 박람회 기간 중 1000만이 넘는 방문객이 찾아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서울뿐이 아니다. 전국 곳곳의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정원박람회를 개최하고 있다. 거리와 공원뿐 아니라 아파트 단지와 쇼핑몰, 가게들과 카페에도 정원이 들어서 초화가 만발한다. 침체된 건설경기와 쪼그라든 지자체들의 예산에도 불구하고 정원과 관련된 용역과 일들은 넘쳐 옆 동네 건축계가 부러운 눈으로 볼 정도이다. 마치 이제는 정원이 조경을 대체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든다.

정원의 시대를 두 손 들어 환영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원의 시대를 불길하게 바라보며 깨어있으라고 외치는 이들도 많다. 국토개발 시대에 조경의 시대를 이끌었던 대부분의 원로 조경가들과 교수들은 정원에 함몰된 조경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기존의 계획과 설계의 담론을 주도했던 엘리트 조경가들과 지지자들은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불편한 시선으로 우후죽순 생겨나는 정원박람회를 바라보고 있다. 누군가에게 지금 절정기의 꽃처럼 만발하는 정원의 향연과 축제는 누군가에게는 조경의 종말을 예견하는 매우 불길한 조짐이다. “Memento Mori” 늘 화려함 뒤의 쇠락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는 이들을 각성하게 한 계기는 아마도 세 가지일 것이다. 

그 하나는 경쟁적으로 열리고 있는 정원박람회의 전국적인 흥행. 순천의 성공은 모두가 축복하였다. 늘 순창으로 오해받던 순천이 정원을 통해 엄청난 경쟁력을 갖게 된 일은 조경의 성공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후 수많은 도시가 기존의 공원, 기반시설로 작동하던 하천, 생태적으로 중요한 산지 등 모든 가능한 땅의 조건을 묻고, 따지도 않고 정원박람회를 개최한다고 선언하자 시선이 달라졌다. 관광버스를 타고 단체로 와서 구경할만한 알록달록한 꽃과 시설물의 향연을 보는 것이 조경이 추구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가치인가? 

또 다른 계기는 정원 도시의 범람이다. 서울시는 2024년 공원·녹지 업무를 담당하던 푸른도시국을 정원도시국으로 바꾸고 1000개가 넘는 매력 정원을 서울 곳곳에 만들겠다고 선언하였다. 이때 조경계의 인사 여럿이 항의 전화를 하거나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정원과 유사한 개념을 도입하여 정원 도시를 표방하는 전국의 지자체는 30여 개나 된다. 정원이 조경을, 공원과 녹지의 이름을 대체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책의 방향과 예산의 흐름이 조경이라는 이름이 품고 있던, 경관, 공원, 녹지, 생태의 넓은 영역보다는 정원이라는 미시적이고 세부적인 영역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제 실제 두꺼비 서식지보다 두꺼비 조형물이 있는 두꺼비 정원이 중요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 서울정원박람회의 변신과 성공이 역설적으로 논쟁적 이슈를 제공하였다. 서울정원박람회는 오래된 공원에 새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전략적인 목적을 갖고 계획되었다. 많아도 10개 정도의 작가 정원이 선정되었고 학생과 시민들이 소소하게 참여한 정원들이 만들어졌다. 일관성없는 정원들을 비판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정원은 공원 한편에 세를 들어 살게 된 임차인과 같은 존재감 정도였다. 그러나 2024년 뚝섬 한강공원에 개최된 국제정원박람회에서 수십 개에 달하는 기업 정원과 기관 정원을 유치하면서 정원박람회의 정원의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2025년의 보라매공원 서울국제정원박람회의 규모는 더 커졌다. 작가 정원은 7개로 줄었지만, 훨씬 많은 기업과 기관, 지자체들이 참여했다. 공원에 정원을 더 이상 배치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공원 전체가 정원으로 가득 찼다. 서울정원박람회의 성공을 목도한 다른 지자체들도 같은 방식으로 기업들의 후원을 받아 공원의 곳곳을 공원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2026년 서울숲에 이보다 더 큰 규모의 국제정원박람회가 기획 중이다. 각양각색의 정원들이 기존의 공원을 압도할 수도 있게 되자 서울숲을 설계한 원로 조경가가 우려의 목소리를 전해오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과 우려에 틀린 말이 없다. 방문객이 몰려든다고, 화려한 꽃들이 만발한다고, 풍성한 프로그램들이 이어진다고 꼭 좋은 공간, 바람직한 장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경계는 한편으로 불편한 마음으로 정원박람회를 바라보지만, 한편으로는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도 없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기성 설계회사들과 대형 엔지니어링사들이 독식하도록 만들어 놓은 계획·설계의 판에서 그나마 젊은 조경가들이 작품을 하고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정원박람회이다. 크고 작은 정원공모전들은 자신의 설계를 하라고 배우지만 졸업 후 10년은 일을 해야 자기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현실 속에서 학생들이 다시 조경에 관심을 갖고 조경가의 꿈을 꾸게 하고 있다. 학생들의 정원에 높은 관심 때문에 보수적인 대학도 교육의 방향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정원박람회 덕분에 그동안 황무지에 가까웠던 식재 설계에 관한 관심이 늘고 시공의 품질이 향상된 것도 사실이다. 도로를 놓듯이 평당 단가로만 책정되던 조경공사에서 벗어나 작품을 위한 시공의 전문가들이 나타나고 시장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원박람회가 우려스러운 기성 조경가들은 정원박람회에서 수상한 후배들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야 하고, 비판적인 교수들은 정원박람회에 참여하겠다는 학생들을 격려할 수밖에 없다. 어쩔 수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가 성장할 제도적인 발판을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왜곡된 시장구조를 만들어내었고,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학계는 계속 학생들과 시장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교육만을 반복해 왔다. 느닷없이 등장한 정원의 열풍이 마비되어 가던 조경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정원의 열풍을 비판만 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조경계 내부의 사정에 있지 않다, 정원박람회가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주고 있는지는 조경의 밖에서 봐야 한다. 가장 큰 변화는 보통 사람들이 정원을 통해 조경을, 공원을 다시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부르고자 할 때는 시민, 부정적인 시선으로 부를 때는 대중이라는 불리는, 조경계와 무관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친구, 아이들이 정원을 좋아한다. 고가의 설계비를 주어 가며 해외의 저명 조경가를 모셔 와도, 전문지와 학술지에서 아무리 멋진 작품을 추앙해도 50년간 조경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던 보통의 사람들이 공원을 다시 찾고, 나무와 풀과 꽃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원의 대중적 인기는 정치와 행정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전국의 시장, 군수들이 지방정원을 만들기 위해 전담팀을 조성하라고 지시한다. 예전에는 공원 관련 이슈는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지자체장들이 다른 일정을 취소하면서까지 정원박람회에 수차례 방문하고 귀빈을 모셔 온다. 늘 예산 심의에서 최하위 우선순위로 분류되어 삭감되거나 아예 사라져 버리던 조경 관련 정책이 정원으로 개명하고 나니 손쉽게 예산이 책정된다. 조경가들이, 교수들이 아무리 목청 높여 조경의 중요성을, 새로운 공원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해도 듣지 않던 행정이 스스로 정원을 만들기 위해 기획하고 움직이고 관련 법이 빠르게 제정되고 있다. 

작년 조경계에서 수많은 상찬을 받은 최고의 작품은 오목공원일 것이다. 이를 설계한 박승진 선생님이 서울국제정원박람회에서 작가 정원을 조성하였다. 젤리코 어워드 수상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로 정영선 선생님의 희원과 선유도공원이 새롭게 다시 주목받았다. 정영선 선생님은 서울국제정원박람회에 기업의 후원을 받아 큰 정원을 조성하였다. 정원박람회에 조성된 이들의 정원 역시 비판의 대상인가? 아니면 조경계가 인정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고급문화의 영역의 작품을 하는 조경가들은 괜찮지만, 정원을 일관성 없는 주제로 정원을 알록달록하게 만드는 일부 조경가들의 작품이 문제라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대중적 인기에 영합해 공원을 정원으로 바꾸겠다는 행정과 정책 자체가 문제인 것일까?

정원박람회가 바람직하다, 바람직하지 않다라는 흑백논리는 사실 무의미하다. 비판의 목소리도 타당하고, 옹호의 목소리도 정당하다. 비판자들과 옹호자들 모두 어느 한쪽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얽혀있다. 설령 한목소리로 이를 비판하는 것이 조경의, 그리고 공원의 정의라고 할지라도 사실 그 목소리는 지금 태풍과도 같은 정원의 열풍 속에서 묻혀버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말 고민해야 할 것은 정원이 가져온 이 변화를 어떻게 긍정적인 힘으로 바꾸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게 하는가이다. 지금의 정원은 그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아직은 모르는 성배이다. 그 안에 든 것은 죽음을 가져다줄 독일 수도, 새로운 생명을 줄 성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성배에 담긴 그 무엇인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비판자들의 예언처럼 독이 될 수도 있고 옹호자들의 축복처럼 성수로 변할 수도 있다. 

공원과 녹지에 예산을 쓰는 것에 늘 부정적이었던 도시전문가인 친구가 주말에 가족을 데리고 보라매공원을 가는데 혹시 정원을 설명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공원 곳곳을 차지한 정원을 가족과 함께 한 바퀴 둘러본 친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좋긴 좋네. 정말 오랜만에 공원에 나오는 것 같아.” 그리고는 아들을 쫓아 가짜 꽃으로 장식된 메타몽 가든의 대기열에 참여하면서 작별의 인사를 했다. 인파가 너무 몰린 꽃이 만발한 공원을 보며 다시 한번 좋은 공원은 무엇일까 자문해 보았다. 오랫동안 우리의 조경가들의 심상에 좋은 공원의 원형은 센트럴 파크였고, 아마도 지금도 그러할 것이다. 공원설계를 처음 하게 된 옴스테드가 센트럴 파크를 만들기 위해 모델로 삼은 것은 18세기 풍경화식 정원을 모태로 한 영국의 공원과 정원이었다. 20세기의 조경은 사실 지난 세기 정원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KakaoTalk_20250727_185140537_02.jpg

KakaoTalk_20250727_183703577.jpg

KakaoTalk_20250727_183916765_01.jpg

KakaoTalk_20250727_190157302_03.jpg
EnglishKorean
검색
Generic filters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