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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 김아연이 땅 위에 써내려 간 상상의 시학

2024-03-05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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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가 김아연이 땅 위에 써내려 간 상상의 시학

실제와 허구, 유용과 무용을 오가는 김아연의 디자인은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도시로 가져온다.

KIM AH YEON

땅 위에 써내려 간 상상의 시학.




아파트 단지 출입구에 마련한 ‘메도우카펫’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양탄자에서 영감을 받았다.

아파트 단지 출입구에 마련한 ‘메도우카펫’은 아라비안나이트의 양탄자에서 영감을 받았다.




Q 서울시립대학 교수이자 조경 스튜디오 스튜디오테라(Studios Terra)를 이끌고 있다. 조경교육과 디자인, 설치미술 등 활동 범위가 다채롭다



A 조경은 내 전공이자 평생 고민거리이고, 자연에 다가가는 방법인 동시에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다. 조경으로 말하고 싶은 걸 때마다 맞는 방식으로 실천해 왔다.


 

2021년 덕수궁 일대에서 열린 〈상상의 정원〉 전에서 선보인 ‘가든카펫’은 서구식 카펫을 한국의 전통 식물 문양으로 재구성하는 데서 출발한 작품.

2021년 덕수궁 일대에서 열린 〈상상의 정원〉 전에서 선보인 ‘가든카펫’은 서구식 카펫을 한국의 전통 식물 문양으로 재구성하는 데서 출발한 작품.




Q 일상공간 설계와 설치미술 작업을 병행해 왔다. 실제와 허구, 유용과 무용을 오가는 경험은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A 개념이 강한 공간을 좋아한다. 보는 것을 넘어 질문과 본질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개념이 강하면 다소 타협하거나 축소되는 경우가 있지만 설치미술 작업은 표현하려는 메시지와 심상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어 좋아한다. 상상은 좋은 공간을 창작하는 메커니즘이니까.






Q ‘자연과의 관계 회복’은 당신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A 땅과 식물은 유연하고 나약하지만 무한한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항상성을 지닌다. 혹독한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일 년이 지나면 다시 눈부신 벚꽃과 단풍을 만난다는 사실. 어린 나무들이 자라 숲을 이룰 거라는 기대. 반복과 예측 가능성이 주는 위안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준다. 사회의 진보는 변화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화하는 유동성 속에서도 본질을 부여잡는 것도 필요하다. 자연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도시와 일상에 가져오는 것이 조경의 역할이다. 그래서 자연과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 내 작업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 것 같다.



아파트 외부 공간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 중점을 둔 네이처 갤러리 모델정원.

아파트 외부 공간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데 중점을 둔 네이처 갤러리 모델정원.



Q 2020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한국관에서 선보인 ‘블랙 메도우(Black Meadow)’는 금강의 갈대를 엮어 만든 바닥 설치미술 작품이다



A 금강 갈대는 귀하고 비싸서 조금밖에 못 썼다(웃음). 대신 사탕수수를 섞었다. 과거 금강 하구에는 지역에서 나는 갈대로 빗자루를 만드는 마을이 있었다. 하지만 하구 둑이 조성되면서 물의 흐름이 막히고 생태계가 교란됐다. 갈대는 물론 갈대꽃으로 빗자루를 만들던 장인들도 점점 사라졌다. 세계적으로 빗자루를 만들 수 있는 식물이 100여 종이 넘는다. 천연 빗자루의 소멸은 한 지역의 생태계와 그에 기반한 오랜 전통 기술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말라버린 초원, 즉 생명이 사라진 자연을 상징하는 설치미술 작품을 통해 우리가 만든 현실을 온전히 대면하기를 바랐다. 동시에 그 폐허로부터 다시 살아나게 될 생명력을 기대하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



김해 클레이아크 미술관에서 선보인 ‘우리마을숲’

김해 클레이아크 미술관에서 선보인 ‘우리마을숲’



Q 2021년 덕수궁 〈상상의 정원〉전에서 선보인 ‘가든카펫(Garden Carpet)’ 역시 바닥을 대상으로 한 작업이다



A 우리는 수직성을 숭배하는 문명에 살고 있다. 더 높고 빠르게. 근대 도시가 진화해 온 방식이다. 나는 조경의 본질이 땅에 있다고 생각한다. 낮게 깔리는 것, 내려다봐야 하는 것, 수평적인 것, 우리가 하찮게 여겨왔던 것을 대변한달까. 손이 아닌 발의 영역에 속한 것에 대한 반항적 끌림이 풍경의 바닥으로 향하게 만든 것 같다. 바닥에 구현된 상상의 정원을 통해 사람들이 고개 숙여 땅을 볼 수 있으면 했다.



녹사평역 공공미술 프로젝트 ‘숲 갤러리’

녹사평역 공공미술 프로젝트 ‘숲 갤러리’



Q 아동을 위한 야외 놀이터를 많이 디자인했다. 조경의 문법으로 만든 놀이공간은 어떤 차별점이 있나



A 놀이터가 조경의 차별점을 만들진 않는다. 다만 조경가의 시선에서 아이들이 자연과 만나는 방식을 눈여겨보고 있다. 아이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자연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어린시절 놀이를 통해 얻은 생태적 감수성과 자연 지능이 기후위기 시대의 미래 세대들이 가져야 할 덕목 아닐까? 조경가로서 이 점을 예민하게 생각한다.



021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블랙메도우’ 모두 조경적 상상력에 기반한 설치미술 작품이다.

2021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블랙메도우’ 모두 조경적 상상력에 기반한 설치미술 작품이다.



Q ‘생태학적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강조해 왔다



A 조경에서 공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수많은 관계망을 포함하는 것이다. 조경으로 인한 공간 변화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선다. 얼마 전 한 아파트 단지에 조성한 ‘네이처 갤러리’라는 정원에서 누군가 족제비를 발견했다더라. 설계 당시엔 족제비까지 상상하지 못했지만, 지금 그곳에는 이전에 보지 못한 새와 곤충을 비롯해 다양한 생물이 찾아온다.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관계와 변화를 상상하는 힘이 생태학적 상상력이다.



유니세프한국위원회와 함께 한국 최초의 아동권리광장으로 조성한 군산 맘껏광장.

유니세프한국위원회와 함께 한국 최초의 아동권리광장으로 조성한 군산 맘껏광장.



Q 근래 새롭게 공개된 프로젝트를 소개한다면



A 경관개선사업을 마치고 올해 9월 일부 구간을 개방한 제주 중문대포 주상절리대가 있다. 국제설계공모에 당선돼 프로젝트 디자인 감독으로 활동했다. 주상절리는 25만 년 전 용암 활동으로 만들어진 지질유산이지만, 관광지로 조성되다 보니 각종 조형물과 공원 시설이 복잡하게 들어서게 됐다. 소위 ‘포토 스폿’이라는 이벤트성 조형물에 점령당한 관광 문화를 보다 성찰적인 방식으로, 시설물이 아닌 경관 자체가 중심이 되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싶었다.



서울어린이대공원 내에 있는 맘껏놀이터. 낙후된 놀이시설을 철거하고 어린이들의 자발성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연친화형 놀이터다.

서울어린이대공원 내에 있는 맘껏놀이터. 낙후된 놀이시설을 철거하고 어린이들의 자발성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연친화형 놀이터다.



Q 김아연이 이뤄내는 조경의 원천은



A 자연적으로 생성된 경관 구조와 찰나의 자연 현상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영감의 원천이다. 스스로 지독한 낭만주의자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움과 상상, 이상향의 힘을 믿는다.



새 단장을 마친 제주 중문대포 주상절리대. 용암의 흐름과 일체성, 기나긴 시간 끝에 만들어진 본래의 대경관을 회복하는 데 설계의 초점을 맞췄다.

새 단장을 마친 제주 중문대포 주상절리대. 용암의 흐름과 일체성, 기나긴 시간 끝에 만들어진 본래의 대경관을 회복하는 데 설계의 초점을 맞췄다.



Q 가까운 미래에 만들고 싶은 공간이 있다면



A 머릿속 상상의 공간을 드로잉으로 그려내고 싶다. 그런 작업들이 쌓여 언젠가는 실제로 공간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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